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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출근길의 지하철 2호선은 당산철교 건너 타박타박 걷다가 신도림역에서 속알맹이 시커멓게 채우더니 허리를 동여맨 채 떠돌기 시작한다. 바닥에도 타고 천정에도 오르고 창문에도 매달린, 아저씨 아줌마 아가씨 총각 할머니 여편네들. 저마다 겨드랑이 품에는 남들이 먼저 가져갈세라 허겁지겁 낚아 챈, 무료신문 한 자락씩 쑤셔 넣고 안심한 표정들. 신문 조각들을 바닥에도 펼치고 천정에도 펼치고 창문에도 펼치고 급기야 손바닥에도 펼쳐대고 읽다가 결국은 코나 마저 풀고 선반 위로 던져 버린다. 간간이 전동차가 다리에 힘이 풀려 돌부리에라도 채였는지 덜커덩하고 멈추면 여기 저기서 '밀지 말라'는 말풍선들이 사이다 거품처럼 피어 오르다가 잠시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에 제 부끄러워 소리없이 터져 버린다. 강남역을 지날 때쯤이면 전.. 2012. 1. 2.
물난리 고향에 갑작스런 폭우가 내렸단다 허겁지겁 드린 안부전화에 아버지는, '허허허, 냉장고가 다 떠내려가는구나' 헛웃음인지 너털웃음인지 모를 소리만 며칠 후 찾아간 부모님의 청과물 가게 상업지구는 최우선 수해복구지역이라던가 물난리 흔적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보이지 않고 시장 바닥엔 아버지 웃음소리만 떠다닌다 속만 썩이던 두 아들은 출가하고 적적함만 남아서였을까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면서도 어머니는, ‘작은 아들 고향 온다는 소식에 물난리는 저으기 물러났다’ 헛웃음인지 너털웃음인지 모를 소리만 이 난리통에도 대목은 놓칠 수 없다며 눈물 마른 스티로폼 더미 잔잔하게 말리고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웃는 목청으로 청과물을 펼쳐 놓는다 부모님의 시장 바닥엔 온통 작은 아들만 떠다닌다 2012. 1. 2.
자유낙하 하늘을 향한 비상... 자유로워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 위를 날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갖는 막연한 동경. 매무새 어설픈 옷자락 펄렁거리며 날아 오르는 수많은 이들. 공기는 차가워지고 숨은 가빠온다. '왜 날아 올라야만 하지? 이건 전혀 자유롭지가 않잖아?' 그래서 한 번쯤은 눈을 감고 끝없는 자유낙하... 이대로 떨어지면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아이들이 소풍놀이하는 풀내음 가득한 잔디밭에 앉을 수는 없을까? 그러다가 눈을 뜨면 금세 단단한 지표면이 시야에 들어오고 이렇게 충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시 바람을 일으켜 비상... 왜 자꾸만 위로 날아 올라야 하는지는 아직도 몰라. 2012. 1. 2.
뼈다귀해장국 밤 늦도록 한잔 기울일 때 자주 만나게 되는 한 뚝배기 가득 채워 넘쳐 흐르는 뼈다귀탕. 문득 이런 고깃살 한 점 한 점을 너무 쉽게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 조차 사치스러웠던 한 때를 너무 쉽게 잊고 있지는 않은지, 잘 견디고 건너며 지나온 그 길들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살점만 오밀조밀하게 발라 먹고 내동댕이치는 뼈다귀처럼 이젠 아프지 않으니 그 기억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았는지... 주의할 것. 2012. 1. 2.
어른의 산(傘) 눈앞을 가릴 정도로, 하지만 싫지는 않을 정도로 한 무더기 내리는 눈. 꼬마 아이는 양팔을 벌리고 하늘 향해 웃지만 난 기꺼이 우산을 받쳐 들었다. 나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총총 걸음을 옮긴다. 하얀 눈에 뭐 그리 더러운 것 묻어 있다고 나는 또 뭐 그리 순결하다고 두터운 점퍼 솜털에 달라붙는 하얀 알갱이들 툭툭 털어내며 깔끔한 모양새 흐트러지지 않게 애를 쓴다. 나도 꼬마 아이였던 시절엔 하얀 눈은 결코 기피할 상대가 아니었다. 하늘 향해 팔 벌리고 입을 벌려 세상에 내리는 눈을 모두 혼자서 맞이하고 싶었다. 그 때는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 조차도 그다지 성가시지 않았다. 책가방을 들어 올려 머리만 겨우 감춘 채 신나게 길을 달려 젖어도 유쾌했었다. 그 뿐이랴. 꼬마였던 나는.. 2012. 1. 2.
완전한 식사 해가 저물어 오늘이 다함을 감사하며 지하철 역으로 달려가 나와 같은 남들을 단 한 명이라도 더 제쳐 그들보다 빠른 밥 한 공기 해치울 심산으로 열 길은 될 법한 계단을 한 움큼 쥐듯 뛰어 넘고 개찰구를 넘어서자마자 밥을 먹는다. 행여 구걸하는 절름발이 노인네라도 마주칠까 곁눈질하며 밥을 먹는다. 행여 잊혀진 옛 애인이 찾아와 울음이라도 놓을까 안절부절하며 밥을 먹는다. 우걱우걱 씹어대는 입 밖으로 밥알이 튀겨 나가는지도 모르고 밥을 먹는다. 간혹 불안정한 전압에 울렁거리는 승강장의 엷은 조명처럼 밥알이 넘어가는 목구멍도 희미하게 울렁거리기는 하나 끝까지 통곡은 하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한 줌의 밥까지 다 밀어 넣고 이내 빳빳한 옷깃으로 입을 훔쳐 진실을 닦아 내어 또 한 번의 완전한 식사를 끝마친다. 2012. 1. 2.
Myself on the Road 나는 길에 집착한다 길은 나를 만나러 가는 통로 나는 외로워 나를 만나러 간다 때론 이 길이 맞는지... 우두커니 망설이다 종점까지 가서도 아직 길은 더 있지 않냐고 떼를 써본다 그렇게... 허공에 대고 못질하듯이내 자신을 잡아보고 싶은 욕망 2012. 1. 2.
세면대 손을 씻다 빨려들었다. 아니... 뛰어들었다. 수채구멍을 지나 하수관으로 역겨운 냄새 참으며 길고도 긴 터널을 지나면 바다에 안길 수 있을까... 2012. 1. 2.
눈은 딴 곳을 보고 있어도 손은 의도한 방향으로 잘 움직인다. 누가 심심풀이로 손금을 보자고나 하지 않으면 등을 뒤집어 손바닥을 유심히 쳐다 볼 일도 없다. 열 마디의 손가락을 움직여 갖가지 표현을 내뱉기도 하다가 추운 바람에 냉큼 주머니로 숨는 알아서 잘도 움직이는 손들. 어떤 것은... 눈을 속였지만 손은 진실을 알고 있지도 않을까. 2011. 12. 1.
싸움을 위한 시 싸움을 위한 시 그 사내도 언제였는가는 소년이었다. 부서진 시멘트 담 자락에서 꼬마 아이들의 눈동자를 주워 담고 차갑게 시린 아스팔트 옆에서 어린 소녀의 꿈을 안아 주었던, 매서운 겨울바람 앞에 눈을 치켜뜬 채 눈물 흘리던 소년이었다. 어느 날 어둔 밤 임산부의 자궁을 헤치고 갓난 아기의 살점을 파먹으며 달려드는 화적(火賊) 떼에 치여 소년은 추락한다. 이런 마당에 시인은 꽃의 향기로움과 봄의 싱그러움을 찬양하느라 무아지경이다. 곧 시인은 죽어 마땅하다. 대갈통을 흠뻑 적시는 문드러진 향 내음에 덮여 무아지경으로 죽어 마땅하다. 시인이 죽으면 소년은 부활하리니. 소년은 곧 손톱이 다 닳도록 발버둥쳐 살아남은 이의 새까맣게 탄 영혼을 지니고 싸움꾼이 되어 돌아오리라. 그는 곧바로 시인의 무덤가에 가장 치욕.. 2011.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