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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n잡러’는 슈퍼맨이 아니다. (n잡 트렌드에 대한 오해와 판타지를 경계하며)

by hue-chan 2020. 9. 24.

- 누가 ‘n잡’이란 단어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20년째. 현재 나를 칭하는 직함은 총 네 가지다.
기획자, 작가, 영상감독, 연극연출가.
사실상의 밥줄이었던 IT 기획 업무는 업계 특성 탓에 이직도 잦았다. 오래 전의 취재기자 생활까지 더하면 정규직이나 프리랜서로 몸담았던 직장은 10여 곳에 달한다.

옛날 같으면 ‘한 곳에 오래 붙어있지 못하는 끈기 없는 인간’이 되었을 거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니 ‘n잡러’라는 듣도보도 못한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누군가가 또 그럴듯한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n잡러가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강좌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나는 의도치 않은 결과론적 n잡러다.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직장생활과 창작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병행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기자와 IT 기획자로서 생계를 유지했고, 창작 활동은 순수예술 분야여서 사실상 수익이 거의 없었다.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그것을 일반적인 취미생활이라고 부르기엔, 투자한 시간과 비용이 꽤 많으며 몰입도가 상당했다는 특이점이 있다. 그리고 10년 넘게 작품을 쓰고 연출활동을 꾸준히 지속하면서 프로페셔널한 작업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뿐이다. 이런 삶의 자취가 산문집을 출간하는 데도 한몫했다.

- ‘n잡’은 동시에 여러 개의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


결과론적 n잡러로서, ‘n잡’이라는 정체불명 트렌드의 속성을 들여다보았다. n잡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오픈마켓이나 수익성 블로그와 같이 운영방법을 익힌 후 온라인상으로 실행하는 재택 가능한 부업이다. 다른 하나는, 책 출간이나 콘텐츠 판매, 강연 등과 같이 전문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수익 파이프 라인을 생성하는 방법이다.

모두 그럴 듯 하지만, 퇴근하자마자 녹초가 되는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얼마나 실효성 있는 제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적어도 현재의 본업과 다른 잡들 사이에 최소한의 연관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완전히 문외한인 분야를 파고드는 일은 보통의 에너지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n잡은 n개의 노동을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며, n배의 소득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앞서 언급한 n잡들은 대부분 높은 소득을 기대하기 힘들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소득은 노동시간과 강도(혹은 전문성)에 비례하는 것이지, 직업의 개수와는 무관하다. 고소득인 1개의 직업과 저소득 직종 n개 중에서 하나만 택하라고 하면, 모두 고소득 직종 1개를 선택할 것이다. 당장의 소득 증대를 기대하고 n잡을 시도한다면 좌절할 가능성이 크다. n잡은 소득의 n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전환할 직종을 준비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실상 현재 ‘n잡러’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보라. n개의 직업을 거쳐왔을 뿐이지, 현재는 한두 가지의 일만 붙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그 경험들을 토대로 수익 파이프 라인을 생성하는 것이지, n개의 노동을 동시에 진행하지는 못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지만, 그것들이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는 한두 가지에 머문다. 하나의 작업이 끝나야 다른 작업을 개시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소득 증대를 위해 n잡을 꿈꾼다.>



- 조급한 n잡은 삶의 질을 망친다 -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전제 하에, n잡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여가시간을 필수적으로 희생해야 한다. 휴식을 줄여야만 한다. 어설프게 소득을 늘리려고 노동시간을 확대한다면 허리가 휠 수 있다. 야근이 없다고 전제하더라도 일반 직장인은 하루 8시간 노동을 한다. 퇴근 후에는 휴식과 놀이가 필요하다. 그 시간을 또 쪼개어 노동에 투여하면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드라마도 보고 주말 여행도 즐겨야 하는데, 부업에 손댈 여력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한 개의 직업에만 열중하는 것이 두 개의 직업을 병행하는 것보다 삶의 질 측면에서 훨씬 이로운 것이다. 이런 면에서 n잡은 ‘워라밸’이라는 트렌드와 정면충돌하는 양상이기도 하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트렌드가 서로 대세라고 맞붙는 모순의 형국이다. 워라밸을 포기한다면 n잡에 무작정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제안하는 n잡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블로그를 관리하고 오픈마켓을 운영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어느 정도 구축을 했다고 하더라도, 수익은 고작 몇만 원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블로그로 수백만 원을 벌고 오픈마켓으로 시작해 억대 연매출을 올렸다는 성공담에 혹할 수도 있다. 굉장히 특수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 그 정도의 수익은 전업으로 올인한 사람들에 한한다. 퇴근 후 짬을 내어 관리하면서 그런 수익을 바란다면 복권 당첨을 기대하는 확률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바이럴 마케팅과 이커머스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라면 초기 학습에 들이는 시간만 해도 상당할 것이다.

수익 파이프 라인도 마찬가지다. 전문지식이나 누적된 경험은 단시간에 축적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책을 출간하는 일도 기본적인 글재주는 있어야 한다. 어설픈 콘텐츠는 곧 어설픈 수익성으로 연결된다.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마음이 앞선 만큼 수익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 ‘잡’이 아니라 ‘취미’를 찾아라 -


하지만 이 글은 n잡을 포기하라고 종용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n잡에 대한 허상을 좇지 말자는 취지일 뿐이다.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나면, 그 트렌드와 관련한 강좌를 여는 사람들만 늘 단물을 가져가는 세태가 불만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워라밸을 포기했는데, 한 달에 10만 원 남짓한 수익이 발생한다고 치자. 그 정도로는 직장을 관두거나 전직을 못 하기는 말할 것도 없고, 라이프 패턴의 작은 변화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 부수입 때문에 여가와 취미를 포기해야 할 뿐이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n잡을 실행하기 전에 냉정하게 자신의 여건을 먼저 헤아려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시간도 부족하고 자본금도 없는 일반 직장인이 n잡러로 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론은 무엇일까? 잡이 아니라 ‘창의적인 취미활동’을 찾아보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다. 취미를 찾는 데 있어 ‘수익성’을 먼저 떠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 순간 그것은 취미가 아니라 결국 ‘일’이 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좋아하던 취미도 ‘생업’이 되면 흥미를 곧잘 잃는다. 생업은 스트레스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반면 취미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희적 기능을 갖는다.

그 취미가 추후에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거나, 콘텐츠로 가공할 수 있는 성격이라면 금상첨화다. 미래 확장성이 있는 취미활동 - 예를 들면 그림, 캘리그래피, 공예, 글쓰기, 영상, 음악 등 창작 성격을 띠는 활동을 예로 들 수 있다. 또는, 흥미가 느껴진다면, 현재의 본업과 연계하여 디테일한 전문지식을 책이나 콘텐츠로 만드는 일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어떤 분야를 선택하든, 첫 번째 고려사항은 ‘흥미’다. ‘본업 + 부업’이 아닌 ‘본업 + 여흥’으로 설계해야 번아웃을 방지할 수 있다. n잡이 n개의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라는 오해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n잡에 대한 열망은 자칫 슈퍼맨 콤플렉스(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로 빠지기 쉽다.

n잡은 직업 유연성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업 중에서 시류와 흥미에 따라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히 부러움을 살만 하다. 비록 소득이 눈에 띠게 증가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직업 말고도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가져다준다. 심리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다만 그것이 두 배, 세배의 소득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환상은 허탈감을 불러올 수 있다.

n잡러를 꿈꾸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일과 휴식, 그리고 취미생활의 밸런스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행복하게 확장할 수 있다.


* 여담이지만, 2002년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을 이끌었을 때, 한국식 토털싸커를 추구했었다. 전원공격과 전원수비가 가능한 팀을 만들어 갔었다. 선수들은 공격과 수비가 모두 가능한 ‘멀티플레이어’가 될 것을 주문받았다. 하지만 히딩크의 성공은 일반인들에게 독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직장에서도 업무를 가리지 않고 다 잘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가 되라는 착취적 요구가 생겨난 것이다. 멀티플레이어란 때에 따라서 공격수로 나서거나 수비수로 전환할 수 있는 선수인 것이지, 한 경기에서 공격과 수비까지 2명의 역할을 혼자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라 ‘초인(超人)’이다.